[예수 성심 성월 특집] ‘예수 성심’ 알아보기
인간 구원 위해 상처 입은 성심… 무한한 하느님 사랑의 상징
십자가에 매달려 창에 찔린 후
예수님 옆구리에서 나온 물과 피
세례의 물과 성체성사를 의미
알라코크 수녀 신비 체험 이후
성심 공경 완전한 형태 갖추고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기 시작
예수 성심 공경의 역사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기 이전에 주관적이고 개인적이었다. 그러다 12세기 무렵 성 안셀모, 성 베르나르도, 성 보나벤투라가 중심이 돼 예수 성심을 공경했고, 이후 특히 13~14세기 신비가들이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수립 발전시켜 나갔다.
14세기에는 예수 성심 공경이 ‘새 신심 운동’이라는 신심 운동과 관련해 번져갔다. 16세기 들어서는 예수회가 예수 성심 공경을 활성화했다.
17세기에 얀센주의와 같은 이단적인 사상이 성체성사를 경시하자, 성심에 대한 공경이 공적으로 시작됐다. ‘예수 성심과 성모 신심의 전례 공경의 창시자’로 불린 프랑스 오라토리오 회원 성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1672년 10월 20일 프랑스 주교들 인준을 받아 교회 최초로 예수 성심 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그는 예수 성심을 위하여 처음으로 시간 전례를 바치도록 한 인물이다.
예수 성심 공경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세계적으로 보급된 계기는 프랑스 파레이르모니알 성 마리아 방문 수녀회의 성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Margarita-Maria Alacoque, 1647~1690)다.
알라코크 수녀는 1673~1675년 여러 차례 예수 성심에 대한 신비 체험을 했는데, 그 환시에서 예수님은 성녀에게 예수 성심 축일을 제정하고 예수 성심 금요일과 성시간을 장려하라는 임무를 줬다.
6월 예수 성심 성월은 프랑스 우아조(Osieaux) 수도원과 여러 지역에서 신심 행사로 시작됐으며, 1873년 비오 9세 교황이 대사 반포와 동시에 정식 인가했다. 예수 성심 축일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부터 대축일로 기념해 오고 있다.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 관구장 고무찬(베네딕토) 신부는 “현대에서 예수 성심 공경의 의미는 이웃을 향한 봉사와 정의를 향한 투신 등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했다.
고 신부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6년 성 마리아 방문 수녀원에 남긴 편지를 예로 들었는데, 당시 교황은 “그리스도의 성심에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어떻게 함께 일치하게 하는 지 알게 된다”며 “이런 방식으로 미움과 폭력이 만연된 곳에 예수 성심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것이 구세주 성심에 의해서 요청되는 참된 보상”이라고 썼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