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지음 / 211쪽 / 1만7000원 / 세계사 출간 20주년 특별 개정판…맏딸 호원숙 작가 회고록 곁들여
참척(慘慽).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 故 박완서(엘리사벳) 작가는 1988년 하나뿐인 아들을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잃는 참척의 고통을 겪는다. 「한 말씀만 하소서」는 다섯 자식 중 하나였지만, 아들로서는 하나밖에 없던 자식을 먼저 보내고 처절하게 쏟아낸 일기다. 훗날 활자가 될 것을 염두에 두거나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닌 극한 상황에서 통곡 대신 써 내려간 것이다.
“원태야, 원태야, 우리 원태야,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하느님도 너무하십니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지 25년 5개월밖에 안 됐습니다.” (15쪽)
그는 아들의 죽음 후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을 일기에 담았다.하느님에 대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삶의 무력감 속에서 울음 대신 펜을 들었다. 책에 담긴 일기는 1988년 가장 끔찍했던 여름을 지나 가을·겨울로, 그리고 서울 집에서 부산의 첫째 딸네 집으로, 부산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의 언덕방 등에서 겪은 체험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딸의 집에 있으며 ‘무슨 잘못을 해서 아들을 데려갔는지’ 신을 향해 이유를 묻고 또 물으며 증오와 울부짖음에 가까운 기도를 토해내던 그는 이해인(클라우디아) 수녀 제안으로 수녀원 언덕방에 머물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도 ‘한 말씀만 달라’며 하느님께 애걸복걸했지만 끝내 응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수녀들과 방문객들 틈에서 죽음에 대한 갈망 또한 교만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또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궁극적으로는 신과도 고통을 나눌 줄 몰랐던 것이 가장 큰 죄였음을 깨닫는다. “나의 고통까지도. 당신이 내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144쪽)
이번 책은 출간 20주년 특별 개정판으로 나왔다. 수필 ‘언덕방은 내 방’ , 서신 ‘이해인 수녀님과의 손 편지’ 등 20년이 지나 새롭게 추가된 이후의 이야기들이 곁들여졌다. 맏딸 수필가 호원숙(비아) 작가의 시선으로 본 어머니 박완서에 대한 기억도 실렸다.
‘마음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집어 드는 책이다’라는 한 독자평처럼, 20년 동안 수많은 독자를 감싸안고 일으켜 주었던 책은 고통의 끝자락에서 천천히 회복되어 나오는 작가의 여정을 나눈다. 그 속에서 우리 삶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