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희년

이주연
입력일 2024-12-28 17:47:54 수정일 2024-12-30 11:50:08 발행일 2025-01-05 제 342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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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4일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거룩한 문이 열렸다. 2025년 희년이 시작된 것이다. 희년은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공식 표어로 2026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까지 이어진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희년은 유다교 전승으로부터 이어져 왔다. 희년이 되면 유다인들은 자기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고 경작지는 쉬고 종들은 해방되며, 빚은 면제된다. 

레위기 25장에 따르면 안식년을 7번 지낸 그다음 해를 희년으로 지정하여 가나안에 정착할 때의 상태, 곧 해방의 상태로 되돌려 해방을 마련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지파별로, 부족별로, 가문별로, 집안별로 각자가 받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편에 따라 땅을 팔고 다른 집 땅을 소작하기도 하고, 종살이에 이르기까지 처지가 곤란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 꺾인 처지를 단숨에 일으키고자 한 것이 희년이었다.

가망이 없으니 찌그러져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게으른 사람들은 대책이 없다고 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준 복은 사람을 가린다고 으스대는 것이 아니라 일으키고 품어 안고 다시 함께 사는 것이 희년의 의미였다.

오늘날 그 희년은 있지만 희년에 마땅히 해야 하는 실천은 사라졌다. 집 잃은 이들은 쫓겨나 거리를 방황해야 하고, 일터를 잃은 이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꿈을 잃은 젊은이와 몸과 마음으로 건강을 잃은 노인들은 철저하게 배제되는 세상이다. 되돌아가고 싶으나 되돌아갈 집과 직장은 사라졌다.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들은 새로운 세계에서도 이방인이다.

유다인들의 희년이 처음 생겼던 그때도 그 희년의 실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땅은 누군가의 재산이 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던 종살이의 처지는 누군가의 재산 증식 도구가 되었다. 잃었던 땅과 처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처음 받았던 땅보다 더 많이 가진 이들이, 처음에는 이웃이었던 이들을 종으로 부린 사람들이 그 권리를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더 많이 가진 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잃어버린 하느님의 질서를 다시금 되찾는 구원의 핵심이었다.

2024년 12월을 뜨겁게 보내고 2025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광장에서 또다시 희년의 요청을 받고 있다. 때가 되어 문이 열리고 거룩한 전례로 선포되는 희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대사라는 개인의 구원에 감사하는 희년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희망의 해를 갈망하고 있다. 

세월호와 이태원의 종살이를 겪었던 세대들은 ‘다시 만난 세계’를 노래한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모두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암울한 독재 시대에 함께 불렀던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와 다르지 않은 진짜배기 희년에 대한 노래다.

이제 희년은 유다 전통에서 이어진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 모두의 평화이다. 피부색이나 이념이나 가진 것이나 학력이나 위치한 자리에 따라서 달리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 그 누구도 저버리지 않는 모두의 평화이다. 세상이 평안해야 교회도 평안하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헌신할 때 세상도 교회를 아끼고 돌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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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금호1가동(선교)본당 주임)
나승구 신부는 1991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서울대교구 사목국 차장, 대학생연합회 지도신부, 신월동본당 주임,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