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산문 부문 수상자 윤흥길 작가

이주연
입력일 2025-04-29 11:18:17 수정일 2025-04-29 11:18:17 발행일 2025-05-04 제 3440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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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전통에 새겨진 민족정신 담은 작품…천신만고 끝에 완간"
건강 악화에도 포기하지 않고 25년간 삶과 신앙 바쳐 집필
일제강점기 착취·고통 견뎌낸 선대 삶 돌아보는 계기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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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 작가는 "「문신」은 내 작가 생애에서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간 소설"이라며 “경박단소한 시대 흐름에 반해 중후장대한 서사의 가치를 되살리고자 했다 ”고 말했다. 이주연 기자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산문 부문 수상작 장편소설 「문신」은 윤흥길 작가가 삶과 신앙, 언어와 역사에 바쳐온 시간의 총합으로 평가된다. 윤 작가는 집필을 시작한 지 25년 만에 완간된 작품에 대해 “혼신의 힘을 다해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소설”이라며 “굉장한 애착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밝혔다.

소설은 순탄하게 쓰이지 않았다. 연재 잡지가 폐간돼 중단되기도 했으며, 건강 악화로 집필을 포기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공황장애 증세로 인해 극심한 불면과 불안을 겪었습니다. 정말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시기에 아내는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고, 교회에서도 함께 기도해 주셨습니다.” 

이후 치료와 기도로 점차 회복됐고,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그는 “그런 면에서 「문신」은 제게 매우 특별하고 의미가 깊은 작품”이라며,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이 작품 그 자체뿐 아니라, 그간 쏟은 수고와 노력을 인정해 주시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더욱 감사하다”고 말했다. 

「문신」은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가족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몸에 새기는, 한민족 고유의 문신 풍습 ‘부병자자(赴兵刺字)’에서 출발한다.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기보다 더 거슬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관습이다. 책을 읽다가 이 내용을 접한 윤 작가는 고유의 귀소본능, 즉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이 시신으로라도 고향에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포착했다. “살아 돌아오든 죽어 돌아오든, 고향에 묻히고 싶은 마음이 민족의 뿌리”라는 것이다. 

또 일제 강점기 일본 홋카이도 등지로 징용된 조선인들이 “밟아도 밟아도 죽지만 말아라, 또다시 꽃 피는 봄이 오리라”고 노래한 ‘밟아도 아리랑’ 구절을 접하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두 가지는 「문신」을 기획하는 모티프가 됐다. 

“세계의 다양한 문신 가운데 한국의 문신은 정말 독특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묻히고 싶다’, ‘시신으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처절한 귀소본능을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소설을 통해 “문신이라는 전통 속에 담긴 깊은 민족정신이 독자에게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한 그는 아울러 “일제강점기의 착취와 고통을 견뎌 낸 선대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뜻도 덧붙였다. 

소설에는 다양한 신념과 욕망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일제 하에서 한국인들이 겪은 여러 가지 작은 인생 문제들을 한 집안에 몰아넣어 한반도 전체 상황을 그려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윤 작가는 작품에 담긴 부병자자 풍습을 그리스도교의 본향 개념과도 연결 지었다. “작품 속 인물 최순금은 개신교 신앙을 지닌 강인한 여성으로 그려진다”며 “그리스도교인이 천국을 본향으로 삼는다는 면에서, 민족의 귀소본능과 천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하늘과 땅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결국 같은 선상에서 만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 신자로 자라며 신앙이 자연스레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고 밝혔다. 

“사랑과 겸손, 온유 같은 가르침이 문학 속에 스며들도록 쓰고 있습니다. 직접 선교를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교 정신은 숙명처럼 작품 속에 녹아 있습니다.

「문신」은 현대 독자에게 쉽지 않은 소설이다. 긴 문장과 생소한 어휘, 복잡한 구성은 빠르고 간결한 흐름을 선호하는 세태와는 거리가 있다. 윤 작가는 “처음부터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기로 작심하고 쓴 소설”이라며 ,"‘경박단소(輕薄短小)’한 시대 흐름에 반해,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서사의 가치를 되살리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요즘은 모든 게 짧고 간결하게 소비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죠. 문학도 깊이와 무게가 필요합니다.”

소설에서 돋보이는 것은 낯설지만 풍부한 어휘와 인물들의 생생한 말투다. 남도 사투리와 입말, 옛말들이 많아 ‘우리말에 이런 말들이 있었나’ 싶어 사전을 뒤적이게 만든다. 이런 풍성한 말맛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곁에 두고 단어를 수집해 온 결과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고, 고딕체 표제어를 훑어가며 단어를 외우는 게 취미였다. 그는 독자들 사이에서 “사투리 같다”는 반응이 많지만, “대부분은 순우리말이나 표준어”라고 했다. 

“「문신」은 작가 생애에서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간 소설입니다. 이렇게 긴 작품은 남은 생에서 다시는 쓰지 못할 것 같아요. 제 대표작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현재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집필 준비 중이다. 앞으로  완주 한지를 소재로 한 소설도  꼭 쓰고 싶다고 했다. 1942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인 윤 작가는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장마」, 「완장」, 「황혼의 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이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삶의 진실과 시대의 모순을 꿰뚫는 리얼리즘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며, 절제된 문체와 강렬한 사회의식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 21세기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박경리문학상, 장흥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 수상작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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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 지음/각 16500원/문학동네

「문신」은 2024년 전 5권으로 완간된 대하소설로, 원고지 6500매에 출간 도서 기준 2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대작이다. 윤흥길 문학의 결정체이자, 필생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2018년 1~3권이 먼저 출간됐으며, 2024년 4·5권이 출간되며 완간됐다. 

전북 익산을 모티브로 한 가상의 지역 ‘산서면’이 배경인 작품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의 혼란기에 이르기까지 한 지역 사회와 가족 공동체가 겪는 갈등과 파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중심 서사는 대지주 최명배 가문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최명배가 시대의 혼란을 틈타 부를 축적한 인물이라면 그의 자녀들은 각기 다른 신념과 길을 선택한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격동적인 시기 속에서 친일과 독립, 신앙과 불신, 권력과 저항 사이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걷는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한 시대의 혼란과 인간 군상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자유를 위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누군가는 사상을 위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또 누군가는보신을 위해 ‘덴노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등 시대에 흔들리는 인간 군상의 삶을 조밀하게 그렸다.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인물들과 제국 시대의 생활상을 선명히 되살려낸 묘사는 탁월하고, 전라도 지방의 맛깔스러운 방언은 물론, 읽는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즐거움을 주는 감각적인 문장들이 풍성한 언어의 향연같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고전이 탄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이 되어주는 작품이다. 이례적으로 완간도 되기 전 박경리문학상을 받았다. 박경리문학상은 국내 최고 수준의 상금을 수여하는 세계문학상이다. 완간 후에는 장흥문학상을 받았다.

◆ 산문 부문 심사평

“밟아도 아리랑, 밟아도 아리랑, 죽지만 않으면, 또다시 꽃 피는 봄이 오리라”는 아리랑 서사의 결정판이다.

한국 소설사는 어쩌면 윤흥길의 「문신」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더 이상 「문신」같은 소설이 나오기는 어려울 터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일어난 여러 역사적 사건을 복합적인 영혼의 숨결로 꿰면서, 고통의 강물을 건너는 아리랑 정서와 언어를 잘 빚어냈다.

고향으로부터 뿌리뽑히고 쫓겨난 민초들이 죽어서라도 귀향하기 위해 문신을 새기고 간절하게 몸부림치는 이야기, 그런데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깊은 고통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고 달래는 서사다. 

기층의 아리랑 언어를 정말 웅숭깊게 되살렸다. 버림받은 이들이 가슴으로 빚어내는 말들의 카니발이 현묘하다. 윤흥길이 되새긴 민간 수사학의 절정이다. 역동적인 말들이 인물의 개성을 살리고 시대의 징후를 돌올하게 드러낸다. 작은 사람들의 마음들이 모이고 얽히면서 큰 서사의 금자탑을 쌓았다. 한국어로 쌓아 올린 우뚝한 서사인 「문신」에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을 헌정한다.

- 우찬제(프란치스코) 문학평론가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