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사진

정정호 기자

pius@catimes.kr

온유한 아버지 모습으로 하느님 사랑 남기고 떠나다

한세기 가까운 인생을 하느님께 봉헌한 전 마산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가 8월 28일 하느님 품으로 떠났다. 박 주교의 하느님 사랑은 대단하다. 사제가 된 역사를 보면 우여곡절이 참 많았는데도 결국엔 주님의 목자가 됐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늘 웃으며 대했다는 고인을 추모하며 박 주교가 살아온 97년의 삶과 신앙을 돌아봤다. ■ 박정일 주교 선종 이모저모 ◎… 박정일 주교의 선종 소식이 알려지고 마산교구청에 마련된 빈소에는 추모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산교구 75개 모든 본당 신자들은 매시간 순서대로 빈소를 찾아 위령기도와 미사를 봉헌했다.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2900여 명이 빈소를 방문했으며 27대의 위령미사가 봉헌됐다. 빈소를 가득 메운 추모객들은 큰 어른으로서 교회를 위해 한평생 헌신해 온 박 주교가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바라며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또한 각 교구 주교들도 빈소에 속속 도착해 조문에 함께했다. 31일 봉헌된 장례미사에는 25명의 주교단과 140여 명의 사제, 60여 명의 수도자와 1450여 명의 신자들이 참례했다. ◎… 박 주교가 마산교구장으로 재임할 당시부터 지금까지 늘 가까이에서 함께했던 조카 박성임(클라라) 씨는 박 주교를 향한 각별한 마음을 전했다. 시인이기도 한 박 씨는 “주교님은 저에게 영적 멘토가 되어주셨던 분”이라며 “좋은 탈렌트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공동의 선익을 위해서 잘 쓰라고 격려해 주셨다”고 말했다. 박 씨는 “장례미사 당일 새벽에 잠이 깨서 주교님을 위한 조문을 써보다가 몇 번이나 울컥하며 눈물을 흘렸다”면서 “늘 똑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한결같이 대해주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 박 주교의 외조카인 김진영(브루노·서울대교구 용마산본당) 씨는 “부모를 잘 공경하는 것이 주님을 공경하는 것과도 같은 거라며 항상 효를 많이 강조하셨던 것이 생각난다”면서 “늘 신앙생활에 충실하라고 당부하셨던 주교님 말씀대로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 경남 고성 이화공원묘원 성직자 묘역. 박 주교가 안장된 위치는 제2대 마산교구장인 고(故) 장병화(요셉) 주교 바로 옆자리. 박 주교는 그렇게 전임 교구장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장지까지 동행했던 신자들은 “두 분 주교님이 다시 만나게 됐으니 좋아하시겠다”며 “두 분이 함께하시니 적적하진 않으시겠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 박정일 주교 발자취 제주·전주·마산 3개 교구장 역임 한국교회 첫 피데이 도눔 사제 파견 시복시성주교특별위 초대 위원장 맡아 124위 시복에 지대한 공헌 ◎…하느님께 충성을 박 주교는 192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전주교구 천호성지를 연상케 하는 산골 마을이라고 회상하던 곳이다. 부모님은 신자가 아니었고 산골 마을이라 공소도 없었지만, 삼촌을 따라 성당에 다니며 세례를 받았다. 중학생 시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1945년 4월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속으로 늘 사제를 꿈꾸며 본격적으로 신학교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져 시름시름 앓자, 어머니가 마침내 박 주교의 손을 들어줬다. 1948년 9월 바라던 덕원신학교에 입학한 기쁨도 잠시, 1년을 채 넘기지 못한 이듬해 5월 북한 공산 정권이 신학교를 폐쇄했다. 심지어 당시 평양교구장이던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는 납치돼 행방불명 상태였다.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제의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신학교를 가기 위해 월남 계획을 짰다. 1950년 2월 27일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해주로 갔다. 그의 간절한 마음과 달리 첫 시도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후 두 달간의 옥살이가 시작됐다. 온갖 협박과 구타,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따뜻한 봄날 풀려난 박 주교. 봄기운을 만끽하기도 전 한 달여 만에 6·25전쟁이 터졌다. 이후 북한군에 강제 징집됐지만, 용케 도망쳐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 안 제오르지오(George Carroll) 몬시뇰이 써준 ‘신자 확인서’를 품에 안고 월남에 성공했다. 대구, 제주, 부산 등으로 피난을 다니며 임시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박 주교는 1952년 8월 14일 로마 유학길에 오른다. 피난살이 중인 가족이 걱정되긴 했지만 교회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로 떠났다. 박 주교는 1958년 11월 23일 로마에서 평양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2년간 사회학 공부를 하며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박사학위 준비 도중 귀국하라는 명을 받고 1962년 귀국해 부산교구 초량본당에서 첫 사목을 시작했다. ◎…순명이 체질 “어떤 면으로 보면 ‘행운아’ 같아요.” 생전 스스로를 행운아라 표현하며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고 말했던 고(故) 박정일 주교. 변화 많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 속에서 늘 하느님께 감사하며 주어진 삶에 순명해 왔다. 박 주교는 한국교회에서 3개 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된 유일한 주교다. 제주·전주·마산교구에서 교구장을 지낸 그는 첫 주교 임명 소식을 들었을 때 “청천벽력 같았다”고 했다. 두려움과 망설임이 더 컸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무모하다 싶을 만큼 어려운 일이 맡겨질 때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1977년 4월 제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박 주교. 그는 같은 해 5월 31일 주교품을 받고 제주교구를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이 두터운 교회’, ‘사회 속에 현존하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5년간 제주교구장으로 사목하던 중 1982년 6월 24일 전주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1987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며 많은 일을 했다. 박 주교는 그 가운데 가장 뜻깊었던 일로 두 가지를 꼽았다. 박 주교는 훗날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남미 페루에 교구 파견 선교사를 보낸 일과 고향을 닮은 천호성지를 조성한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마산교구장에는 1988년 12월 15일 임명됐다. 마산교구에서는 ‘사회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친교와 봉사, 증거의 삶을 사는 소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또 신설 본당도 많아졌다. 박 주교는 당시 관리국장이던 최용진 신부(이냐시오·원로사목)와 1년에 본당 하나씩 만들자는 계획을 세우며 이를 실천해 나가기도 했다. 아울러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주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과거사 반성’을 통해 교회 쇄신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기도 했다. 특히 2001년부터 11년간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은 박 주교는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추진한 124위 시복시성에 큰 공헌을 했다. ◎…온유한 아버지 박 주교의 사목 표어는 ‘충성과 온유’(집회 45,4)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늘 웃으며 대했다는 박 주교는 본인의 모토대로 삶을 살아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 주교가 ‘제2의 고향’으로 여겼던 마산교구 사제들은 그가 ‘온유한 아버지’였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사제들에게는 잘못해도 야단치기보다는 타이르며 온화한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허성학 신부(아브라함·원로사목)는 “어떤 사람이든 욕하는 법이 없고 꾸짖을 때에도 늘 부드럽게 말씀하셨다”며 “화낼 줄 모르시고 따뜻한 아버지처럼 대해주셨다”고 말했다. 최근 10년 전부터 박 주교를 모시며 임종까지 지킨 최용진 신부는 이웃에 살며 자주 만나 술도 한잔씩 했다고 회상했다. 최 신부는 “하느님께 충성하던 주교님의 믿음이 참 보기 좋았다”며 가장 기억에 남는 주교님의 유머를 소개했다. “주교님께서 술자리에서 이런 농담을 자주 하셨어요. 통일이 되면 평양교구에 가서 주교하고 싶다고요.” 박 주교는 2002년 11월 11일 마산교구장에서 은퇴하며 사목 일선에서 물러났다. 누구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컸던 박 주교는 부모님의 반대, 신학교 폐쇄, 강제 징집 등 다양한 여러움을 이겨내고 사제가 됐다. 이제는 그 사랑을 남기고 영원히 하느님의 곁으로 떠난 박 주교. 그는 2003년 본지에 기고한 13편의 글을 마무리하며 사제서품 성구가 유난히 생각난다고 썼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8,2)

발행일 2024-09-03 제3408호 10면

한평생 교회에 헌신한 참 목자…영원한 천상 행복 누리시길

교회를 위해 한평생 헌신하며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모든 이를 품어주던, 온유한 아버지와도 같았던 참 목자가 주님 품으로 떠났다. 제3대 마산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가 8월 28일 선종했다. 향년 97세. 박 주교의 장례미사는 31일 오전 10시30분 마산교구 진주 신안동성당에서 봉헌됐다. 이날 장례미사는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주례,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를 비롯한 전·현직 주교단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 장례미사에 참례한 유가족과 사제·수도자·신자들은 오랫동안 교회를 위해 헌신해 온 박 주교의 삶을 돌아보며 주님께서 박 주교에게 영원한 안식을 내려주시길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제4대 마산교구장 안명옥(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박정일 주교님께서 남기신 사랑과 헌신이 우리 교구에 어떤 의미였던가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면서 “생명의 하느님께서 박정일 주교님에게 영원한 명복을 허락하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영성체 후에는 전 제주교구장 강우일(베드로) 주교 주례로 고별식이 이어졌다. 고별식은 ▲고(故) 박정일 주교 약력과 조전 소개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와 교구 사제단 대표 최경식(야고보) 신부,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이한규(안드레아) 회장의 고별사 ▲고별예식 ▲수원교구 안산 대학동본당 주임 신민재(미카엘) 신부의 유족 인사 순으로 진행됐다. 이용훈 주교는 고별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눈부신 천국에 온전히 정착할 수 있도록 받아주시고 영원한 안식을 내려주시리라 확신한다”면서 “주교님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마음은 못내 슬프고 아쉽지만, 주교님께서는 끝없는 행복과 기쁨이 펼쳐지는 천상전례에 참여하게 되셨다”고 전했다. 사제단 대표로 고별사를 전한 최경식 신부는 “주교님은 참으로 인자하신 성품의 소유자셨다”면서 “한평생 사제로서 주교로서 헌신한 주교님의 삶을 기억하며 사제직의 숭고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고 말했다. 장례미사 후에는 교구장 서리 신은근(바오로) 신부를 비롯한 사제단과 수도자, 신자들이 이화공원묘원으로 이동해 묘지예절을 진행하며 박 주교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했다. 192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난 박정일 주교는 1958년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고, 1962년 귀국 후 부산교구 초량성당 보좌로 사목생활을 시작했다.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던 1977년 제2대 제주교구장으로 임명돼 주교품을 받았다. 박 주교의 주교품 성구는 ‘충성과 온유’(집회 45,4)다. 1982년에는 제6대 전주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당시 한국교회 최초로 교구 소속 해외선교 사제(Fidei Donum 선교사) 3명을 라틴 아메리카에 파견했다. 1988년 12월 제3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돼 이듬해 2월 착좌 후 14년여간 사목하다 2002년 11월 사임, 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박 주교는 또한 2001년부터 11년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시복 추진 대상자 선정과 국내에서의 시복 예비심사를 주도하며 124위 시복에 크게 기여했다.

입력일 2024-08-31

제3대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 선종

제3대 마산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가 8월 28일 오후 2시 39분 선종했다. 향년 97세. 고인의 빈소는 마산교구청 1층 대강당에 마련됐다. 장례미사는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주례로 31일 오전 10시30분 마산교구 진주 신안동성당에서 봉헌된다. 장지는 고성 이화공원묘원 성직자 묘역. 박정일 주교는 1926년 평안남도 평원군 동송면 청룡리에서 태어났다. 1950년 서울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입학한 뒤 1952년 로마에 유학해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 로마에서 평양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1962년 귀국 후 부산교구에 입적해 초량성당 보좌신부로 사목생활을 시작했다. 문산성당 주임으로 사목하던 1966년 마산교구가 부산교구에서 분리, 설정되면서 마산교구에 입적했다.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던 1977년 제2대 제주교구장으로 임명돼 주교품을 받았다. 1982년 제6대 전주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교구장 재임 시 한국 교회 최초로 교구 소속 해외 선교 사제(Fidei Donum 선교사) 3명을 라틴 아메리카에 파견했다. 1988년 12월 제3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돼 이듬해 2월 착좌(취임)했으며, ‘충성·온유’(In Fide et Lenitate, 집회 45,4)를 사목 표어로 삼고 봉사하다가 2002년 교구장직에서 사임했다. 박정일 주교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주교회의 의장을 지냈다. 이 시기 주교회의 산하에 한국 천주교 신앙 선조들의 시복시성 통합 추진을 위한 주교특별위원회가 조직됨에 따라, 2001년부터 11년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 추진 대상자 선정과 국내에서의 시복 예비심사를 주도했다. < 박정일 주교 약력 > 1926년 12월 18일 평남 출생(4남 3녀 중 셋째) 1950년 6월 서울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편입 1952년 9월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 입학 1958년 11월 23일 사제 수품 1959년 6월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 대학원 졸업(신학·철학 석사) 1959년 9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입학 1962년 6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안젤리쿰 졸업(사회학 석사) 1962년 9월 1일 ~ 1963년 12월 26일 부산교구 초량본당 보좌신부 1963년 12월 27일 ~ 1967년 1월 13일 마산교구 문산본당 주임신부 1967년 1월 14일 ~ 1970년 8월 19일 마산교구 진주본당(현 옥봉동본당) 주임신부 1970년 8월 28일 ~ 1975년 2월 27일 광주 대건 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1975년 2월 28일 ~ 1975년 7월 15일 마산교구 중동본당 임시 주임신부 1975년 7월 16일 ~ 1977년 5월 30일 광주 대건 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1977년 4월 15일 제주교구장 임명 1977년 5월 31일 주교 수품 및 제2대 제주교구장 착좌 1982년 6월 24일 전주교구장 임명 1982년 8월 10일 제6대 전주교구장 착좌 1988년 12월 15일 마산교구장 임명 1989년 2월 21일 제3대 마산교구장 착좌 2002년 11월 11일 마산교구장 은퇴 2024년 8월 28일 선종 [ 고(故) 박정일 주교 관련 기사 ] >>>> 전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 사제수품 60주년 축하식 >>>> [가톨릭신문 창간 88주년 특집] 88년생 기자, 88세 박정일 주교를 만나다 >>>>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전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1)

입력일 2024-08-28

[사랑 나눌수록 커집니다] ‘허혈성 뇌병증’으로 고통받는 베트남 팜충기엔 아기

사슴처럼 크고 동그란 눈에 까만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이는 아기. 엄마 품에 안긴 팜충기엔(Pham Trung Kien·베드로)을 처음 볼 땐 여느 아기들처럼 토실토실 귀엽게만 보인다. 하지만 비위관(콧줄)이 끼워진 것을 보면 이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큰 눈망울도 어딘가 초점이 흐려 보여 엄마와도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베트남 출신인 팜반린(Pham Van Linh·안토니오)·응우옌티빅레(Nguyen Thi Bich Le·마리아) 씨 부부는 2018년 유학생 비자로 각각 한국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만나 2023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팜반린 씨는 전북과학대학교 한국어학과 졸업 후 취업을 하려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아내 응우옌티빅레 씨는 한국어학과를 2년 정도 다니다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비자 문제로 결국 미등록 이주민 처지가 됐지만, 팜반린 씨는 경남 함안의 한 공장에서 성실히 일하며 가족을 부양해 왔다. 창원이주민센터 베트남공동체에 열심히 참여하며 신앙생활도 충실히 이어왔다. 고단한 타국살이에도 함께하는 가족이 있어 힘이 됐고, 아내의 임신 소식에 더욱 기쁘게 일할 수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던 날인 2023년 10월 13일. 가장 기뻐야 할 순간에 슬픈 소식이 들이닥쳤다. 분만 과정 중 아기가 태반에 질식된 채 태어나면서 ‘저산소증성 허혈성 뇌병증’ 진단을 받았고, 태어나자마자 인공호흡기에 의지해야 했다. 고비는 넘겼지만 뇌병변으로 인한 여러 합병증이 예상되고, 정상적인 수유가 불가능해 튜브를 통해 영양섭취를 해야 하는 상황. 여전히 집중치료가 필요했지만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남짓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비는 이미 2500만 원을 넘어섰고, 여기저기서 빌린 돈도 1500만 원에 이르렀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사실상 장례를 치르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 자포자기한 채 본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샀을 부모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아기 엄마 응우옌티빅레 씨는 위급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다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아기 볼 때마다 마음 너무 아파요.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병원비는 어떻게 낼지, 너무 힘들어서 어쩔 줄 몰랐어요. 베트남 돌아가려 했어요.” 부부의 상황을 알게 된 창원이주민센터 센터장 윤종두(요한 사도) 신부가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병원비를 마련했고, 부부를 설득해 한국에 남아 치료를 받도록 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갑작스런 고열과 폐렴 등으로 그동안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입·퇴원과 여러 치료를 반복하면서 병원비는 늘어만 갔다. 아이 간병을 위해 직장을 그만뒀던 팜반린 씨가 최근 회사 측 배려로 병원 진료시간을 피해 다시 출근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현실은 막막하다. 뇌전증 약물치료와 특수치료, 재활치료 등 앞으로 최소 6개월은 꾸준한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윤 신부는 “병원들과 합의해 의료수가를 국제수가에서 건강보험수가로 조절하고, 이주민센터를 비롯한 여러 기관들과 연계해 겨우 의료비용을 마련했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라면서 “환자 가족은 이미 병원비 지불능력을 상실했고 부채까지 떠안고 있어 도움이 절실하다”고 전했다.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이는 아기 팜충기엔. 그 눈동자에 엄마 아빠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맑게 비춰질 날이 오길 희망해 본다. ◆ 성금계좌 - 예금주 (재)대구구천주교회유지재단 우리은행 1005-302-975334 국민은행 612901-04-233394 농협 301-0192-4295-51 ◇ 모금기간: 2024년 8월 21일(수) ~ 9월 10일(화) ◇ 기부금 영수증 문의 080-900-8090 가톨릭신문사(기부금 영수증은 입금자명으로 발행됩니다.)

발행일 2024-08-25 제3406호 4면

마산 평협, 수산종자 방류 행사

마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 이한규 안드레아, 담당 주용민 리노 신부, 이하 마산 평협)는 6월 27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광암항에서 ‘제2회 해양 생태환경 및 자원회복을 위한 수산종자 방류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방류된 볼락·참돔·쥐치 등 치어 15만 마리는 한국수산종자산업협회에서 기증했다. 이날 행사에는 마산교구장 서리 신은근(바오로) 신부를 비롯한 신자와 지역민 등 400여 명이 함께했다. 신은근 신부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찬미했던 자연이 인간중심주의와 기술지배 패러다임으로 인해 파괴되어, 생명의 근원인 해양이 울부짖고 있다”면서 “생태적 회개와 내적 변화로 생태 복원을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방류 행사는 성모유치원 어린이들부터 시작해 각 단체별로 차례차례 진행됐다. 특별히 성모유치원 어린이들은 이날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환경을 보호하고 사랑해 주세요”라고 외치며 환경보호를 위한 어른들의 관심을 호소해 눈길을 끌었다. 아울러 행사장에는 ▲유령 어구 및 폐어망 사진 전시 ▲생태영성 서적 전시 ▲NO플라스틱 캠페인 등 각종 부스도 함께 마련돼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마산 평협 이한규 회장은 “해양오염 전시를 통해 경각심을 일깨우고 수산종자 방류 행사를 통해 해양 생태 복원에 힘을 보탤 것”이라며 “미래 세대들과 함께 바다 살리기 사업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발행일 2024-07-07 제3400호 5면

[사랑 나눌수록 커집니다] 극소 저체중 미숙아 출산한 엘리얀티씨 부부

동티모르공동체 담당 꾸이도 신부가 엘리얀티·에지디오씨 부부(왼쪽부터 차례대로)에게 안수하고 있다. 동티모르에서 온 이주노동자 엘리얀티(Elianti Rosa Pinto Romi·27)씨와 남편 에지디오(Rodriues Egidio·30)씨. 두 사람은 지난해 가을 대구 동티모르공동체에서 활동하다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부푼 꿈을 안고 찾아온 한국이었기에,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지만 두 사람 모두 성실히 일했다. 원래 경기도 남양주에서 일하던 엘리얀티씨는 임신을 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남편이 있는 대구 논공읍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제적인 이유로 아직 결혼식도 하지 못했고, 낡고 오래된 빌라에 월세로 거주중이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며 의지했다. 에지디오씨는 가족을 위해 야간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일했다. 태어날 아기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소박한 꿈도 곧 실현될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부부에게 갑작스런 고난이 닥친 건 지난 4월. 엘리얀티씨는 조기 양막 파수로 인해 불과 30주 만에 1100g의 극소 저체중 미숙아를 출산했다. 태어난 아기는 호흡곤란증후군으로 신생아집중치료실에서 치료중이다. 태어난 아기를 제대로 한번 안아보지도, 젖 한번 물려보지도 못한 채 그저 가슴앓이만 하고 있다. 엘리얀티씨는 병원에서 찍은 사진으로나마 아기 얼굴을 보며 마음을 달래보지만, 그마저도 인큐베이터 속에서 기계 장치를 달고 있는 모습이기에 마음이 더 아파진다. 아기 사진을 바라보다 결국 눈물을 글썽이고 마는 엘리얀티씨는 “한 달 넘게 아기와 떨어져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면서 “아기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엘리얀티·에지디오씨 부부의 아기. 부부는 이미 체류기간이 지난 미등록 이주민 처지여서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고액의 병원비를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 상황. 지난 달 아내의 병원비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어렵게 해결했지만, 아직 입원 중인 아기의 병원비는 이미 4000만 원을 훌쩍 넘어섰다. 앞으로 치료비가 얼마나 더 들지도 알 수 없기에 더욱 캄캄하기만 하다. 남편 에지디오씨는 아내가 출산한 이후 간병을 하느라 일을 자주 빠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일하던 공장에서도 해고됐다.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던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아기 생각밖에 할 수가 없어요. 병원비 때문에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동티모르공동체 미사에 꾸준히 참례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이어왔던 부부였기에, 친구들을 비롯해 동티모르공동체에서 모금을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동티모르공동체 담당 꾸이도 신부(Naikofi Martinus Quido, 말씀의 선교 수도회)는 “현재 부부에게는 너무 큰 어려움이기에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처지”라며 “이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대구대교구 가톨릭근로자회관 관장 이관홍(바오로) 신부는 “어려운 한국 생활 중에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던 부부였다”면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이 아기와 함께 아름다운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사랑을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성금계좌※ 우리은행 1005-302-975334 / 국민은행 612901-04-233394 농협 301-0192-4295-51 예금주 (재)대구구천주교회유지재단 모금기간: 2023년 5월 17일(수) ~ 2023년 6월 6일(화) 기부금 영수증 문의 080-900-8090 가톨릭신문사 ※기부금 영수증은 입금자명으로 발행됩니다.

발행일 2023-05-21 제3344호 4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